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서방 연합군 (미국, 영국, 프랑스)이 통제하고 있는 서독(Westdeutschland)와 소련이 통제하고 있는 동독(Ostdeutschland)로 나뉘게 됩니다. 서독/동독의 명칭은 통칭으로서, 서독의 정식 명칭은 Bundesrepublik Deutschland (BRD), 동독의 정식 명칭은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DDR, 영문 약자로는 GDR)라고 합니다.
먼저 위키피디아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의 흐름을 살펴봅시다. 세계 2차대전에서 독일은 1945년 5월 8일 항복합니다. (실제로 세계 2차대전이 끝난 기준은 통상 일본이 항복한 1945년 9월 2일을 기준으로 합니다) 이후 어려가지 부침을 거친 끝에, 1949년도에 서독과 동독의 통치체계가 만들어집니다. 사실상 이 시점부터, 1990년도에 서독과 동독이 통일 독일 연방 (Bundesrepublik Deutschland)를 형성하는 시점까지 독일은 동서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서독은 통일 이후 베를린을 수도로 복귀할 것을 전제로, 본 (Bonn)을 임시적인 수도로 규정하였고 정부기관과 의회를 위치했습니다. 반면에 동독의 경우 실질적인 수도를 동쪽 베를린으로 하였습니다. 베를린의 경우 실질적으로 동독의 영토에 둘러쌓여있었으나, 그 상징적인 의미로 인하여 베를린은 연합군의 통제를 받는 서쪽과 동독의 관리하에 있는 동쪽으로 나뉘어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동서의 행정구역을 나누고 시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베를린 장벽 (Berliner Mauer)이 세워집니다. 베를린 장벽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글타래를 열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분단된 독일의 역사와 서방 연합군과 소련간의 경쟁관계를 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대의 서독은 라인(Rhein)강을 중심으로 경제가 급격도로 발전합니다. 이는 이후에 Wirtschaftswunder (경제 기적)이라 불립니다. 전쟁 직후 독일은 기술적 기반을 갖추가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위기해 처해 있었고, 화폐 개혁, 조세 개편, 전후 이민자의 대규모 유입, 국민들의 높은 노동의욕, 미국의 마셜 플랜 지원등으로 통해서 경제성장의 기반을 닦습니다. 반면에, 이 시점의 동독은, 생산성저하, 자원 부족, 비효율적인 계획경제등의 문제로 성장속도가 더뎠습니다. 결과적으로, 각종 실업자 문제등이 발생하고, 결국 상당히 많은 인구가 서독으로 유입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동서 독일의 분단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독일 내부 국경선(innerdeutsche Grenze)은 독일 가운데를 가르지르며 그 길이가 약 1400km에 달했습니다. 이는 무장 국경선으로서, 장벽과 지뢰, 각종 초소로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해당 독일 국경선은 링크된 이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해당 국경선을 바탕으로 1949년부터 1990년까지는 양 독일간의 이동의 통제수준이 달랐습니다만, 전반적으로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가는것은 철저한 수준에서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지도 및 자세한 사항은 다음 위키피디아 항목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독일 내부 국경선, 국경선의 이동).
국경선을 넘는 정책은, 서독 주민은 비교적 쉽고 완만한 규제내에서 움직이지만 (물론 동독을 방문중에는 현지 경찰에 도착과 출발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넘어가는것에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1949년도부터 동독주민은 서독을 방문할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마저도 1968년도부터는 이러한 제한된 형태의 권한마저도 제약받았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보면, 1990년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정책의 변화 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재미있는것은, 베를린의 경우 그 도시가 비록 동독에 위치해 있지만, 전쟁 이후에 연합군의 통제를 받는 서 베를린과, 동독에 통제를 받는 동 베를린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의 수도였던 대도시를, 이렇게 나누어서 두면 국경선이 그어질 수 있지만, 사실상 그 통제는 약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로인하여 서독으로 망명을 하길 원하는 많은 동독의 주민들이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넘어간 다음, 망명신청을 하면 서독 정부가 받아주는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에 둘러쌓여있는 연합군 통치하의 점령 지역이었고, 서독과 서베를린간의 연결은 동독과 협약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런이유로 인해, 1949년에서 1961년까지 거의 300만에 달하는 동독주민이 망명을 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전체 동독 인구의 약 1/7에 달했다고 하니, 동독 입장에서는 이를 국가적인 문제로 생각할 만도 합니다. 이는 결국 1961년도에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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